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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 2004년 부활주일 묵상(빛두레)
 문규현  | 2004·04·08 23:58 | HIT : 9,092 | VOTE : 755

2004년 부활 주일 묵상

문규현 신부(전주교구 부안성당)


        큰잔치를 준비하듯 저도 역시 주님 부활맞이에 부산을 펴고 있습니다. 큰 일 중의 하나가 단연 공소를 방문하는 것입니다. 저희 본당에는 공소가 다섯 개 있는데, 바다 근처에도 있고 평야 한 가운데 있기도 합니다. 어디를 가든 들판과 산과 바다 따위를 바라보며 다녀야 합니다. 한창 꽃눈이 트이고 새순이 돋는 철이어서 시선 가는 곳마다 눈이 즐겁고 마음이 평화로워집니다. 그나마 피로가 쉬이 풀리는 것은 그 같은 자연이 주는 치유력 때문일 것입니다.

        공소에 속한 지역 신자들은 거의가 나이든 농민이요 어민입니다. 얼굴은 햇볕에 그을리고 굵은 주름이 졌으며, 오랜 동안 해온 고된 노동 속에 손들은 거칠고 크고 단단합니다. 때론 일을 하도 많이 해서 허리나 손가락이 굽어버린 이들도 있습니다. 제 얼굴 색도 만만치 않게 검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어서 그들을 만날 때 덜 민망합니다. 이런 선한 사람들에게서 무슨 큰 죄에 대한 고백을 들을 순 없습니다. 늙어서도 여전히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일하며, 하늘의 도우심으로 추수가 잘 되면 감사를 올리고, 그렇지 않으면 다음의 축복을 기약하는 것, 자식들 잘 되라고 기도하는 것이 이들 삶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고생 고생 끝에 풍성하게 거두어들이는 추수의 기쁨과 같은 것입니다. 농민들은 이 봄 조용히 들판에 나가 씨를 뿌리고 모판에 모를 챙기며 그날을 기약하는 중입니다. 무엇 하나 요행수를 바라지 않고 그날의 기쁨을 누리기 위한 과정을 차근차근 정성스럽게 돌보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부활의 신비를 농민들이야말로 번듯한 신학을 듣지 않고서도 익히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농민이 이 봄에 뿌리는 것은 사실 희망입니다. 또 다른 생명과 결실에 대한 기대입니다. 부활은 그렇게 씨앗이 뿌려지고 썩어 없어지는 과정이 없고서는 눈꼽만큼도 실현 가능성이 없습니다. 원래의 자기는 철저하게 부정되어야 새 생명을 창조할 수 있고 부활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부활이 예수님의 죽은 몸뚱이 속에서 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시험 당하고 조롱 받으며 거부당하셨습니다. 혹독하고 비참하기 짝이 없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빈 무덤이 상징하듯이, 그렇게 자신이 산산이 사라지고서야 마침내 예수님의 부활이 이뤄졌습니다. 그제서야 인류의 구원과 희망이 현실로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직의 잣대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올해는 사제단 창립 30주년입니다. 무르익은 청년 30살이 되는 동안 우리는 민족 속에 민중 속에 기꺼이 한 알의 밀알로 그렇게 땅에 떨어져 썩고 죽기를 자처했습니다. 때로 우리 앞에 놓인 버거운 과제들로 인해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망설이고 두려워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닮은 사제가 되기를 강렬하게 열망하고 때마다 최선을 다해 그 길을 선택하고 또 선택해왔습니다. 이제 사제단 창립 25주년 되는 해에 만들고 다짐하였던 '사제헌장'을 다시금 새겨봅니다. 세월이 흘렀다 해서 그 때의 다짐이 빛 바래질리도 없고 그 사이 나라의 상황이 엄청 큰 변화를 겪은 것도 아니니, 아직은 우리의 사제헌장이 30주년보다 더 앞으로 나아가는 사제단의 여정에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를 초대하고 연대하는 기준이 되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사제들이 정성으로 씨를 뿌리고 돌보는 속에서만이 풍성한 결실을 기대하는 농민을 닮고, 농민의 손에 뿌려지고 죽어서 또 다른 탄생을 낳고 열매를 맺는 씨앗처럼 되도록,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사흗날에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 사제들을 위하여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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